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동로 사건 (문단 편집) === 하얼빈 영사관 사건 === 이러한 줄다리기가 이어지던 상황에서 1929년 5월 27일 하얼빈의 소련 영사관[* 중화민국은 소련과 공식적으로 단교를 선언한 상태였지만 소련은 아직까지 단교선언을 하지 않은 상태였고 실질적으로 봉천군벌의 독립왕국이나 다름없던 만주 지역에서는 소련 영사관 등이 남아 있었다.]에서 코민테른 비밀회의가 열리고 있다는 첩보에 장징후이의 지시로 동삼성 북부 특경 관리부가 소련 영사관을 급습하여 39명의 공산당원을 체포하고 중국 공산당을 지원하여 중국 적화 운동을 도모하고 있다는 것을 밝혀내면서 중소 긴장은 강해졌다. 하얼빈의 소련 영사관에서 여러 문서가 압수되면서 동북 당국은 소련이 중동철도를 정치적 선전선동에 이용하고 있다고 비판했고 소련이 조약을 위반했으므로 치안 유지를 위해 부득이한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할 명분을 확보하게 되었다. 장세량은 하얼빈 당국에 러시아인들과 영사관 수색에 대해 절대로 상의하지 말고 만약 소련이 항의하더라도 구금자들을 석방하지 말고 중앙의 허락을 받으라고 지시했다. 또한 수색한 문건을 번역하되 가벼이 선포하지 말며 외국인이 탐지하지 못하게 하라고 주의하였다. 이 때문에 수색 과정에서 많은 문건이 노획되었음에도 한동안은 공개되지 않았으며 간을 보듯이 필요에 따라 조금씩 발표되었다. 이후 여영환과 장국침이 중동철도를 강제접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소련은 저항할 수 없을 것이라고 장쉐량에게 보고했다.[* 여담으로 여영환의 이러한 보고는, 여영환이 중동로 회수 이후에 그 이익을 차지하기 위해서였다는 주장이 있지만 무리한 주장으로 여겨진다. 이후 장국침은 적화 방지는 그저 중동로 회수를 위한 핑계일 뿐이었다고 회고했다.] >"소련 내부는 공허하다. 변방무장은 일격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전쟁이 일어나기만 하면 소련군은 필연적으로 와해될 것이다. 더욱이 해마다 소련의 수확량이 좋지 않아서 민군의 식량문제가 크다. 설사 전쟁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필연적으로 승리는 중국의 것이다." >---- >- 여영환 이에 장쉐량은 측근인 유익비에게 장정추와 함께 길림에 가서 [[장쭤샹]]을 설득하라고 지시를 내리는 한편 심양에서 왕수한, 왕수상, 추작화, 유익비 등과 대책을 논의했다. 유익비는 군사적 충돌을 우려해 소극적 태도를 보였으나 장쉐량이 이미 10여개 군대를 철로연선에 파견할 계획이며 각 방면의 정보에 따르면 소련은 싸울 수 없다고 이들을 안심시켰다. 하지만 소련이 만주 국경에 군대를 증강시키고 있었으므로 장쉐량은 길림, 흑룡강의 4개 사단을 수분하와 만저우리 방면으로 출동하게 하였으며 장쭤샹, 만푸린, 장징후이, 여영환에게 <방적신변법>(防赤新辨法) 12개안을 결정하고 대소련 방비 강화를 지시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